2017년

서울 덕수궁돌담길&정동길 시청역-명보극장사거리까지 5.4km 2017. 07/18

산솔47 2017. 8. 8. 12:17

서울 덕수궁돌담길&정동길 시청역-명보극장사거리까지 5.4km

2017. 07/18 화요일

 

 

오늘은 서울의 걷기 좋은 길 중에 하나인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을 걷고자 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정동에 밀집되어 있는 근대문화건축물인 정동제일교회와 정동극장, 덕수궁 중명전을 둘러보고, 고종황제가 세자(순종)와 함께 1년간이나 머물렀던 정동공원에 있는 구)러시아공사관 터와 황족과 귀족의 자제교육을 전담한 수학원으로 쓰였던 서울주교좌성당 안에 있는 경운궁 양이재까지 둘러보기로 한다. 

course

시청역(1호선/2)-덕수궁.대한문-덕수궁돌담길-덕수궁돌담길로터리-정동제일교회-정동극장-덕수궁.중명전-정동공원-)러시아공사관-새문안어린이공원-새문안로2-새문안로2길로터리-신원전터.회화나무-구세군역사박물관-구세군제일교회-덕수궁돌담길-덕수궁돌담길로터리-서울시청서소문청사.정동전망대-덕수궁.대한문-세실극장-주한영국대사관정문-경운궁.양이재-서울주교좌성당-세종대로사거리-청계광장-광통교-광교-장통교-삼일교-수표교-관수교.청계3가사거리-을지로3가역-명보극장사거리

소요시간: 5.4km/3시간



들머리

전철1호선 2번출구에서 직진, 덕수궁 대한문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덕수궁돌담길&정동길의 시점이다.





덕수궁 대한문




 덕수궁돌담길&정동길 시점




덕수궁돌담길 거리의 악사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건축기법이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운 건축물로 사적 256호다.




정동극장




덕수궁.중명전(重眀殿)

중명전(重眀殿)은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근대건축물로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이다. 처음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는데,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조약(乙巳條)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었다.

1925년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는데,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20072월에 덕수궁에 추가로 편입시켰다.




중명전 만희당지







정동길





신아기념관









정동공원

정동공원은 단풍이 한 창일 때 오면 더 멋스러울 곳이다. 공원규모는 굉장히 작지만 이곳을 꼭 둘러봐야 하는 이유는 공원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구)러시아 공사관 터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공사관

)러시아공사관은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의 설계로 1890(고종 27)에 건축된 르네상스풍의 벽돌 건물로 러시아공사관 본관으로 사용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3층 전망탑과 일부 기초 유규, 지하통로만 남아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62월부터 1년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내각이 무너지고, 친 러시아파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고종은 독립문을 건설하, 각종 도시개조작업을 하였으며, 파고다공원 등 근대국가 건설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신원전터.회화나무

덕수궁 신원전는 역대어진을 모시고 다례를 올리던 곳으로 고종승하 후 덕수궁부속 전각이 사라진 이후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 경기여고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미국정부소유로 되어 있는데,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황량한 공터에 회화나무만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구세군역사박물관과 구세군제일교회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13층 정동전망대





정동전망대에서 바라 본 덕수궁과 서울특별시청 주변전경






















덕수궁 대한문





세실극장과 정동국밥







경운궁.양이재

경운궁은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 양이재 전각은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광무 9)에 세운 것이다. 경운궁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 11채만 따로 도면을 그렸는데 양이재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양이재는 함희당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 싼 일곽은 홍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1906~1910년까지는 황족과 귀족의 자제교육을 전담한 수학원으로 쓰였고, 1912년부터는 대한성공회가 이곳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에 사들인 후 건물을 옮겼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뒤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있다고 한다. 양이재는 현재 주교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주교좌성당은 1926년 아더딕슨의 설계로 건축된 건축물로 건축초기의 서울주교좌성당은 설계에서 축소한 형태로 건립했다가 1996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서울주교좌성당을 찾는 이유는 경운궁 양이재가 서울주교좌성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의 시점인 청계광장










정릉의 석물로 보수한 청계천의 광통교

태종의 신덕왕후 깍아 내리기는 갈수록 더해 갔다. 14108월 홍수가 나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숭례문과 경복궁을 이어주는 광통교는 한양 최고의 번화가에 놓여 있는 다리라서 사람의 통행량이 많았으며 정월대보름 때는 남녀들이 모여 다리 밟기와 연 날리기 등의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릉의 석물들을 계모인 신덕왕후 보 듯 하여 짓밟아 주기를 바란 태종의 심술은 아니었을까?원래 위치에서 150m쯤 청계천 상류로 이동되어 복원된 광통교의 다리 벽면이 현재의 왕릉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면 더더욱 백미로 뽑힐 병풍석의 구름무늬, 당초무늬 등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다.문인의 옷 주름까지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풍석의 문양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이는 이방원이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한 미움의 극대화 장치였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이곳은 특히 불교용구로 알려진 금강령, 금강저의 완벽한 묘사가 압권이다.

왕릉에 있어야 할 석물들이 생뚱맞게 다리에 있지만, 석공의 혼이 실린 명작중의 명작으로 청계천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청계천 복원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태조에게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였던 신덕왕후를 태종 이방원이 그녀 사후에 그녀가 서럽도록 애석한 조치를 취한 건 역시 권력에 대한 알력 때문이었으리라.

문제는 강 씨가 실질적인 개국 공신인데다 여세를 몰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현비의 자식을 적통으로 보는 정도전, 남은 등이 그녀의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태조도 그녀의 뜻을 따라줬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세자책봉까지는 과업을 이뤄냈으나, 완벽한 왕위승계를 매듭짓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죽 쒀서 개준다고 그랬던가?

그토록 조선 건국을 위해 애를 썼고, 정몽주를 죽이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이방원이었는데 졸지에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길 수 는 없었다.

이방원은 한 씨 소생의 동복형제들과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동복형인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를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신위를 모시지 않았던 것이고, 우리가 어진 성군으로 알고 있는 세종 또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한술 더 떠서 신덕왕후의 영정까지 불살라 버리라 명한다. “오호통제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원본]문화유산여행길










































관수교.청계3가사거리

관수교.청계3가사거리에서 도로에 올라서 오른쪽으로 꺽어져 가면 을지로3가역이 있.






충무공 이순신장군 생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