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서울 덕수궁돌담길과 고종의 길 1.34km길잡이 2018. 12/09

산솔47 2018. 12. 21. 08:19

60년 만에 전 구간 개통한 덕수궁돌담길과 고종의 길 등 1.34km

2018. 12/09 일요일



오늘은 43회원인 친구 유화백의 작품전시회관람을 위해 모이는 날이다. 전시회관람 전에 잠시 가까이에 있는 전 구간을 개통한 덕수궁돌담길 1.1km와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길을 복원한 산책로 편도120m, 왕복240m 1.34km를 걷기로 한다.


10:34-11:16

덕수궁돌담길1.1km와 고종의 길 왕복0.24km 1.34km/42

course

덕수궁대한문-덕수궁둘레길-검문소로터리-덕수궁평성문(후문)-구세군서울제일교회.고종의길입구-고종의길-정동공원.옛러시아공사관터-고종의길-구세군서울제일교회.고종의길입구-주한영국대사관-경운궁양이재-서울주교좌성당-세실극장-대한문

소요시간: 1.34km/42

점심식사

덕수궁돌담길1.1km와 고종의 길 왕복0.24km 1.34km의 트래킹을 마치고, 종로구 돈화문로532(낙원동) 종로3가역1번 출구에서 30m전방 맥도날드골목에 있는 명동찌개마을’(02-744-9033)에서 양푼생돼지김치찌개(14,000/2-3인분, 21,000/4-5인분), 소주 등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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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돌담길 60년 만에 1.1km전 구간개통

덕수궁돌담길이 60년만에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127일 서울시가 그간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막혀있었던 덕수궁돌담길 마지막70m구간까지 전면 개방한다고 밝혔다.

대한문에서 시작해 세종대로까지 이어지던 덕수궁 돌담길은 그간 영국대사관이 점유한 70m구간이 미연결 상태에 있었다.그러나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2014년부터 영국대사관과 협의를 시작해 이날 결실을 이뤄낸 것이다.

이제 덕수궁돌담길끝자락 영국대사관 앞에서 다시 되돌아 나올 필요 없이 1.1km구간을 걸을 수 있게 됐다.이날 연결된 70는 영국이 1883년 매입한 부지로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정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그동안 영국 측은 보안을 이유로 개방을 꺼려왔는데,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담장 안쪽으로 길을 새로 내고, 돌담에 출입구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영국을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장 안쪽 길은 덕수궁 보호를 위해 궁 관람시간과 같이 개방·폐쇄된다.

이로써 덕수궁돌담길이 대한문덕수궁길미국대사관저영국대사관후문영국대사관정문세종대로대한문까지 1.1km가 모두 이어졌다.

[연합뉴스] 기사에서 복사



아관파천 피란길 고종의 길’ 120m 산책로복원

서울 중구 정동의 고종의 길2년에 걸친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810월 개방되었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을 잇는 길로 120m 정도의 산책로다.

이 길은 18962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길을 복원한 것이고, 덕수궁돌담길에서 걷기 시작해 고종의 길 서쪽 끝으로 나가면 옛 러시아 공사관의 3층 전망 탑이 나온다얼마 되지 않는 거리지만 대한제국은 이 길 끝에서 시작됐다. 아내를 잃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며 고종은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간 머무른 뒤 고종은 덕수궁(당시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창건했다. 특별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옷깃을 여미고 차분히 걷다 보면 찬란한 유산을 꽃피운 조선왕조 500년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에도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역사적 뿌리가 닿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고종의 길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방하며 동절기(11~1) 운영시간은 오전9시부터 오후530분까지다. 입장료는 무료다.

[서울경제] 기사에서 복사



아관파천(俄館播遷)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으로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 있던 민비(閔妃)의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貞洞派)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K.I.) 역시 미국 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민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의 실시를 권유하였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 후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매수 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민비 세력과 친미·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였다.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였다.

또한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1895년 음력 8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모 시해로 인해 고조되었던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초래하였다.

[경과]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를 이용하여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기대에 못미치자,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측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이윤용(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2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결과]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해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 대신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 되어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이윤용·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안경수(安駉壽권재형(權在衡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고영희(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국적(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 23()였던 지방 제도를 한성부(漢城府)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으로 대신 초청하였으며,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협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상대리 사이온지(四園寺公望)와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14일자로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니콜라이 2(Nikolai )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같은 해 528일부터 6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Alexiev,K.)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민영환(閔泳煥)비밀회담에서 러시아측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에게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220일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daum백과사전]

    


 

덕수궁돌담길과 고종의 길 1.3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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