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강화나들길 제2구간(강화역사관-초지진) 바닷가 돈대길답사기 2010-02-07

산솔47 2011. 4. 13. 14:38

나라 방어의 최전선, 돈대길..
오래전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 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강이 함께 모여 흐르는 바닷가를 따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 둘러 만든 53개의 돈대를 만나게 된다.

가던 길 잠시 멈추고 돈대에 쌓인 성돌보다 더 많이 쌓인 애틋한 역사 이야기를 들어 보자.
마음이 너무 울적해지면 잠시 눈을 돌려 야트막한 강화도의 산과 논밭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풍경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산 행 지 : 강화 강화나들길 제2구간(강화역사관-초지진) 바닷가 돈대길
산행일자 : 2010. 02/07(일)
산행구간 :
    강화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강화역사관~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용두돈대~광성포대~덕진진~남장포대~덕진돈대.흥선대원군의 경고비~(온수천)~초지진~
    초지대교버스정류소
산행시간 : 21km/6시간30분(식사& 간식시간 1시간 포함)
교 통 편 : 대중교통
소요비용 : 교통비(카드/8,100원)
출 발 지 : 09:00 전철 2호선 신촌역 7번출구


대중교통 :
    신촌시외버스터미날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 건너 첫번째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에서 하차
    해안도로를 따라 강화역사관까지 걸어서 5분 소요
    신촌터미날에서 09:10..
    신촌터미날에서 배차간격(10-15분), 소요시간(1시간30분), 요금(4,200원)
    강화운수 02-324-0611

    초지진 답사후 식사후 초지대교버스정류소에서 신촌행 버스를 타고 합정역 하차
    화도버스터미널에서 배차간격(1시간), 소요시간(1시간30분), 요금(3,900원)
    화도에서 12:00, 12:30(휴일), 13:00, 13:30(휴일), 14:00, 15:00, 16:00, 17:00.. 20:00
    화도에서 초지대교까지 버스로 15분 소요
    초지대교버스정류소에서 13:15, 13:45(휴일), 14:15, 15:15, 16:15, 17:15..
    화도터미날 032-937-3645


  • 제2구간(강화역사관-초지진) 바닷가 돈대길
    제2구간은 수도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담당했던 방위시설인 5진 7보 53돈대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옆으로 철책 너머 염하수로가 유유히 흐르고, 멀리 김포 문수산과 대명리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염하수로에서는 한창 숭어잡이에 열을 올리는 배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한가롭다.
    장어마을이 밀집해 있는 용진진은 홍예만 남은 것을 최근 복원하였으며, 걷는 도중에 강을 보며 땀을 식힐 수 있는 공터가 조성되어 있어서 간단한 음료들도 팔기에 빈 몸으로 걸어가도 상관없다.

    걷기 시작한지 두시간 정도면 광성보에 도착한다.
    광성보 초입에는 음식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했다면 광성보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좋겠다.
    광성보에서 덕진진 입구 사거리까지는 약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데, 이 코스에서 유일한 구릉이 이어지는데 높지 않아 힘든 거리는 아니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초지대교를 지나 황산도쪽으로 걸어가보는 것도 좋다.
    특히 그곳은 갯벌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어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초지진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포탄에 맞은 상흔을 간직한 노송을 볼 수 있는데,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격랑을 그 나무에서 느낄 수 있다.


  • 용진진
    101명의 군사가 바다 지키던 강화 용진진

    강화군 선원면 연리 435-1번지에 있는 강화해협(염하)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
    강화5진7보의 하나. 향토유적 제8호.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의 일부분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만들었는데, 선원면 용진 지역에 위치한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용진진은 북쪽의 가리산돈대, 바로 옆의 좌강돈대, 남쪽의 용당돈대를 관리하였는데, 세 돈대 모두 배가 닿는 곳이다.

    석축은 모두 파괴되고 석문 가운데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문루를 복원하였다.
    남쪽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61cm 이고, 북쪽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 의 규모이며, 석재는 화강석이다.

  • 용당돈대
    강화 용진진의 예하 돈대중 남단의 광성보로 이어지는 지점의 용당돈대는 산 정상에 구축되어 염하를 감시하기 용이하게 되어있다.
    비교적 최근에 복원되어 깔끔한 용당돈대는 해안도로 화도돈대를 지나 용진진 방향 고개 좌측 정상부에 있다.
    내부건물은 병기고. 탄약고로 지어진 건물이다.

  • 화도돈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이 돈대는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후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년(숙종 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강화도의 돈대는 53개 중 49개가 병자호란 43년 후인 숙종 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때 성곽이나 변방 요지에 세워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한 초소인 돈대는 일반적으로 주변보다 높은 평지에 쌓는데, 밖은 구릉을 깎아서 높게 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간척지 벌 가운데의 작은 동산 위에 위치하는 화도돈대는 오두돈대(鰲頭墩臺)·광성돈대와 함께 강화의 7보(堡) 5진(鎭) 중 하나인 광성보(廣城堡)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쪽으로 700보 거리에 오두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1,390보 거리에 용당돈대(龍堂墩臺)로 이어진다.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 주변의 외성은 소실되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水口)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韓用鐸)이 1803년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성벽터로 볼 때 평면은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북쪽에 무너진 성벽의 석재들이 약간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성벽의 터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소실되었다.
    돈대 내부는 과일나무를 심은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 오두돈대
    강화초지대교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나아가면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차례차례 둘러볼 수 있다.
    그 중 광성보를 둘러보고 나와 불은면 오두리에 이르면 강화해협으로 비쭉 고개를 내민 야트막한 산 속에 숨은 오두돈대를 둘러볼 수도 있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입니다.
    강화 지역에는 숙종 5년(1679) 강화 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두고자 돈대를 설치-운영했다.
    오두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 머리를 닮은 언덕 위에 설치되어 있고,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마치 로마시대 넓은 원형 경기장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돈대 위에서 강화해협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청명한 여름날 한낮의 뙤약볕에 지친 자전거족들에게는 잠시 쉬어갈만한 곳 중 하나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나무그늘이 지친 이의 피로를 시원하게 가셔줄 것이다.

  • 광성보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
    사적 제 227호.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의 일부분으로, 조선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다.
    조선 효종 9년(1658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숙종 5년(1679)에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와 함께,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영조 21년(1745년)에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라 하였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 고종 8년(1874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곳으로 어재연 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에도 끝까지 싸웠고, 부상당하여 더이상 싸울수 없는 조선군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기어서라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자살할 수 없는 몇 명의 중상자만이 포로가 되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우는 조선군과 전투를 치른 미군은 물리전에서는 이겼으나 정신전에는 졌다고 판단하여, 더이상 싸우기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 용두돈대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 5년(1679)에 만들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 으로 성벽을 복원하면서, 용두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있고, 뒤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있다.

    용두돈대 앞의 염하는 손돌풍으로 이름난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 동남쪽으로 보이는 곳이 덕포진이고, 덕포진 쪽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언덕위에 보이는 묘가 손돌묘 이다.

    강화대교를 건넌 경우 검문소에서 좌회전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된다.
    강화역사관, 더리미장어구이촌, 용진진, 오두돈대를 거쳐 광성보에 이른다.
    강화초지대교를 건넌 경우 우회전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여 초지진, 덕진진 사거리를 거쳐 광성보에 이른다.

    용두돈대는 광성보 안에 있다.

    손돌목 전설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느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손돌은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경에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풍 이라 하며,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 이라고 한다. 광성보에 들어가면 손돌목돈대가 있다.
    손돌목돈대 동쪽 아래에 있는 용두돈대로 가면, 용두돈대 앞의 염하가 손돌목이다.

    손돌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의 덕포진에 있다.

  • 덕진진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포대도 개축하였다.

  • 남장포대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8포대 중의 하나.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으며, 덕진진의 관할하에 있었다.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이용하여 염하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달 모양의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다.

    대포10문(15문?)이 설치되었다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미국의 함포를 당해내지 못하고 성곽과 포대가 파괴되었다. 1977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여서, 현재의 모양대로 포좌와 대포가 배치된다면, 포탄이 염하 못 미치고 육지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남장포대는 덕진진 내부에 있어서 덕진진 입장료를 낸다.
    공조루를 지나 동쪽으로 이동하면 북쪽으로 염하의 손돌목과 용두돈대가 보이고, 염하 건너 김포의 덕포진의 덕포포대가 동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다.

  • 덕진돈대. 흥선대원군의 경고비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 5년(1679)에 만들었다.
    덕진돈대는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돈대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염하를 지키는 중요한 돈대이다.
    손돌목돈대는 본래 덕진진 소속이나, 지금은 광성보로 들어가야 한다.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세아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으로 신미양요 때, 파괴된것을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 으로 복원하였다.
    덕진돈대를 남쪽으로 돌아서 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한 경고비가 서있다.

    덕진돈대는 덕진진 내부에 있어서 덕진진 입장료를 낸다.
    공조루를 지나 동쪽으로 이동하면 북쪽으로 염하의 손돌목과 용두돈대가 보이고, 염하 건너 김포의 덕포진의 덕포포대가 동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다.
    남쪽 언덕 아래로 남장포대가 보이며 건너편 언덕위에 덕진돈대가 있다.

    대원군의 지령으로 1866년 병인양요에 작성하여 주요 해안에 세워져 쇄국정책을 표현하는 경고비가 있다

  • 초지진 (草芝鎭)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 초지진 (草芝鎭)

    초지진(草芝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인천광역시 사적 제225호이다.
    초지진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그 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특히 운요호의 침공은 1973년 초지진의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여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19세기 후엽, 아시아로의 팽창 정책을 추진하던 미국은 1866년 우리나라의 대동강 유역에 침입했던 제너럴셔먼호를 우리 관군이 공격했던 사건을 빌미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신미양요)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압도적인 무기의 차이로 광성보에서의 전투에서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어재현 장군의 부대가 전멸했으며, 부대기인 '수자기(帥字旗 : 대원수를 상징하는 깃발)'를 빼았기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가진 대포는 그야말로 쇠공이 날아가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쇠공을 피하면 그 근처에는 피해가 없었다.
    반면 미군이 사용하던 대포는 오늘날과 대포와 마찬가지로 땅에 떨어지면 파편이 퍼지며 산산이 부서져 살상 반경이 우리 것에 비해 훨씬 큰 신형 대포였다.

    이러한 화력의 큰 차이로 인해 광성보와 초지진을 지키던 어재현 장군의 부대는 전멸하게 된 것이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 제2구간(강화역사관-온수터미날) 답사기
    강화나들길 제2구간은 강화역사관에서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까지 21km를 걷는 코스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온수천에서 온수리로 빠지지 않고 강화대교에서 초지대교까지 강화외성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한다.

    이 구간은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나라 방어의 최전선인 강화외성길이다.
    강화외성은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으로, 강화읍 월곶리 연미정에서 길상면 초지리까지 약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지금은 해안산책로 아래 땅속에 뭍혀 있단다.


    서울 신촌시외버스터미날에서 강화행 시외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 첫번째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에서 내린다.
    길을 건너 해안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강화역사관에 닿는다.
    강화나들길 제2구간은 강화역사관 정문에서 부터 시작하는데, 정문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길을 묻고 강화나들길 제2구간을 시작한다.

    정문 옆쪽에 세워져 있는 나들길 이정표를 따라 해안산책로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강화역사관 안에 있는 갑곶돈대가 '이섭정'과 함께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강화외성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염하강'이 흐르고, 조금 뒷쪽으로 강화와 김포를 잇는 강화대교 구교와 신교가 나란히 있다.
    강화대교 너머로 김포 '문수산'이 자태를 뽑내고 있는데 문수산성 성곽이 마치 뱀처럼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올라간다.

    강화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에서 시작해 20분쯤 걸었더니 더러미포구에 도착한다.
    더러미포구는 갯벌 장어구이로 유명한 곳인가 보다.
    해안도로를 따라 곳곳에 장어구이 집이 들어서 있다.

    전형적인 어촌풍경이 참 아름답다.
    염하강 강가에 검붉은 색갈을 띤 갈때가 바다, 갯벌 등과 함께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봄이 선뜻 다가온듯 한데 아직은 어름이 녹지않아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정겹게 보인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자랄때가 생각난다.
    추운줄도 모르고 손발이 꽁꽁 얼도록 하루종일 썰매를 타고 쥐불을 놓고... 하던때가 있었는데... !

    해안도로를 비껴 바닷가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는게 너-무 좋다.

    길도 좋고, 경치도 좋고... 무엇보다도 지루하지가 않아서 좋다.
    걷기를 시작한지 1시간..
    지금 시간 11:25분...

    용진진해안 잔디밭에 도착해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는데, 언제나 처럼 준비한 김종만, 이선자여사님의 '과메기'는 역시 그 맛이 최고다.
    산행중에 막걸리가 제 맛을 내는데는 역시 과메기 안주가 제일인것 같다.

    즐거운 시간이 되게 해주셔서 두분! 감사합니다.


    조선시대 효종 7년(1656년)에 쌓고, 102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용진진...
    용진진을 답사한다.

    용진진에서 성곽을 한바퀴 돌면서 성돌이를 하고, 다시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어 '용당돈대'에 도착한다.
    염하를 감시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산 정상에 구축되었다는 용당돈대...
    용당돈대 한가운데는 한그루의 '떡갈나무'가 외롭게 서 있다.

    강화나들길 제2구간에는 중간중간에 13개의 보, 진, 돈대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어 좋다.

    용당돈대를 지나면 '화도돈대'에 닿는다.
    화도돈대는 언덕위에 터만 조성되어 있다.
    화도돈대를 지나 해안가에서 뒤 돌아 화도돈대를 바라보니 책꽂이에 책을 비스듬이 세워 놓은듯한 화도돈대를 떠 받치고 있는 바위가 특이하게 생겼다.

    초지진 쪽으로 가면 갈 수록 바다와 갯벌, 바닷가에 한가롭게 노니는 오리떼들까지 보이는것 모두가 한폭의 그림처럼 너-무 아름답다.

    자라의 머리를 닮은 언덕 위에 설치되어 있다하여 이름 붙혀졌다는 오두(鼇頭)돈대...
    오두돈대는 지름이 32m에 달하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마치 로마시대 넓은 원형 경기장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원형의 경기장처럼 만들어진 성곽위에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에서 출발한지 2시간 45분..
    지금시간 13:15분

    꿀맛보다 더 맛이 있는 점심식사..
    갖가지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 막걸리도 한잔 마시고..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식사후 '오두돈대'를 내려서니 부자집 담장처럼 아주 견고하게 쌓은 성곽 일부가 나타난다.
    강화전성
    강화전성은 흙으로 쌓은 강화외성이 흘러내리자 조선시대 영조 18년(1742년)에 강화유수 김시혁이 일부 구간을 2년동안 전돌로 다시 고쳐 쌓은 성이란다.

    강화전성을 지나니 이번에는 돌로 쌓은 강뚝길을 걷는다.
    왼쪽은 염하강이요, 오름쪽엔 갈때가 끝없이 강뚝길을 따라 이어간다.

    뚝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광성보에 닿는데, 지금까지의 돈대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해안성이다.
    입장료 1,100원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신미 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광성포대가 모여있다.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란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강화외성의 일부분이다.

    조선 효종 9년(1658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숙종 5년(1679)에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와 함께,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 광성돈대
    광성보 안에 위치해 있는 광성돈대에는 소포, 중포,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신미 순의총
    신미 순의총은 조선시대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손돌의 전설이 서려있는 손돌목돈대

    손돌목 전설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느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손돌은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손돌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의 김포시 덕포진에 있다.



    김포 덕포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위치해 있는덕포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의 용두돈대(광성보)와 마주하고 있다.
    덕포진과 용두돈대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이곳은 지금도 매우 물살이 거세게 흐르고 있다.

    덕포진은 조선 선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덕포진에는 3곳의 포대와 파수장터 그리고 손돌의 묘가 있다.

    특이하게 돈대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산책로가 놓여져 있으며 돈대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실로 아름답다.
    또한 날이 좋을 때면 가족끼리 가벼운 피크닉을 즐겨도 좋을 만큼 경치도 뛰어나다.

    강화나들길 제2구간의 돈대는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처럼 축조된 성이 많다.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축조한 손돌목돈대도 예외는 아니다.

    손돌목에서 용두돈대로 내려가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탐방객들을 반기고 있다.
    용두돈대는 남한산성의 연주봉 옹성처럼 바닷가로 툭- 불거져 나온 곳에 위치해 있어 마치 섬에 올라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용두돈대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 5년(1679)에 만들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 으로 성벽을 복원하면서, 용두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나즈막한 해안가에 설치된 광성포대..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를 빠져나오면 갈대숲이 아름다운 바닷가 늪지를 끼고 걷는다.
    늪지를 지나면 강화외성 해안산책로를 걷는데, 왼쪽으로 바닷가 갯벌이 아름답다.
    갯벌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마져 느껴진다.

    덕진진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는 덕진진..

    덕진진 안에 있는 남장포대
    남장포대는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 8포대 중의 하나인데,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으며, 덕진진의 관할하에 있다.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이용하여 염하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달 모양의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다.

    남장포대에는 대포 12문이 전시되어 있는데...

    덕진돈대는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의 돈대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염하를 지키는 중요한 돈대이다.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세아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덕진돈대를 남쪽으로 돌아서 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한 경고비가 서있다.

    덕진돈대를 지나 강화나들길 제2구간의 마지막 종점을 향해 막바지 발길을 옮는데, 초지대교 바로 못미쳐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에는
    초지진 (草芝鎭)이 있다.

    초지진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그 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다.

    강화나들길 제2구간 강화대교에서 초지대교까지 총 21km.. 걷는데 5시간 30분, 식사시간 1시간...
    초지대교로 접근하는 도로변 길을 걷는데 별로 좋지가 않다.
    아예 인도가 없다.
    먼지가 흩날리는 길을 걸어 강화인삼센터가 있는 초지대교입구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를 출발해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를 거쳐 초지진이 있는 초지대교를 지나는 신촌행시외버스가 화도를 출발한지 15분이 지나자 그 모습을 나타낸다.
    버스에 올라타고 1시간 20분..
    합정역에 도착한다.

    합정역에서 내려 음식골목 끝에 있는 추어탕집으로 향한다.
    오늘 강화나들길의 마지막을 장식할 뒷풀이와 저녁식사를 위해... 오늘 참석해 주신 회원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 구간소요시간
    - 08:08 신도림역(전철 2호선)
    - 08:22 신촌역
    - 09:10 신촌시외버스터미날(강화행 시외버스)
    - 10:27 강화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

    - 10:30 강화 청소년수련관버스정류소 강화나들길 제2구간걷기
    - 10:37 강화역사관
    - 10:53 더러미포구
    - 11:25 용진진
    - 11:25-11:50 용진진 해변에서 간식
    - 12:15 용당돈대
    - 12:55 화도돈대
    - 13:15 오두돈대
    - 13:15- 13:45 점심식사
    - 14:30 광성보
    - 15:05 용두돈대
    - 15:55 덕진진
    - 16:45 초지진
    - 16:55 초지대교버스정류소

    - 17:18 초지대교버스정류소(신촌행 시외버스)
    - 18:36 합정역
    - 18:45-19:40 뒷풀이. 식사
    - 19:48 합정역(전철 2호선)
    - 19:56 신도림역

    초지대교버스정류소에서 신촌행 시외버스를 타고 합정역에 내려 향남추어탕집에서 추어탕으로 뒷풀이겸 식사를 한다.
    이 집의 추어탕은 제대로 하는 집이기에 홈지기는 가끔 이 집을 찾는곳이다.
    모두들 맛이 있다고 칭찬들이다.

    향남추어탕
    마포구 합정동 386-39호
    02-337-4649, 011-9730-8681
    추어탕 6,000원
    그런데 이집은 매월 2, 4주 일요일은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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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나들길 제2구간 바닷가 돈대길

    제1부 강화역사관-쌍충비까지 http://blog.daum.net/sansol/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