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종로구 부암동생태문화탐방길 4.0km
2015. 09/08 화요일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을 보기 위해서는 필히 서울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하고, 미술관입장료(관람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는 전시물에 따라 다른데, 지금 전시물은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3’로 일반(5,000원), 경로(3,000원)이다.
트래킹코스
자하문고개정류장-창의문-창의문옛길-서울미술관(0.6km)-석파정-너럭바위(0.3km)-바람길(0.3km)-서울미술관(0.6km)-부암동주민센터(0.3km)-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무계원(0.2km)-반계윤웅렬별장(0.4km)-창의문길-삼애교회(0.6km)-청운공원/서시정-윤동주시인의언덕(0.4km)-자하문고개정류장(0.3km)
소요시간: 4.0km/2:50분, 평균속도(1.4km/시속)
서울미술관과 석파정관람시간 1:15분을 빼면 실제속도(4.0km/1:35분), 평균속도(2.65km/시속)
찾아가기
1. 전철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버스타고 자
하문고개에서 내려 창의문을 거쳐 창의문옛길로 내려가면 도로건너편에 서울미술관이 있다.
2. 자하문터널입구.석파정정류장에서 내리면 도로건너편에 서울미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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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술관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미술관관람 후 미술관3층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다.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시간 11:00~19:00 (입장마감은 18:00까지)
관람요금: 09/06일 일반(5,000원), 우대(3,000원)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50% 할인
서울미술관(02-395-0100) http://www.seoulmuseum.org/nr2/index.php
석파정(石坡亭)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하고 있는 석파정은 대한제국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정자다.
이 정자의 유래는 정자 앞의 산이 모두 바위여서 흥선대원군이 석파(石坡)라는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석파정은 계곡을 끼고 있으며 편안한 너럭바위를 병풍삼아 석파정 앞에 소수운령암 각자와 삼계동 각자와 같이 바위가 있어 차분한 느낌의 공간이며 북악산이 멀리 보이고, 석파정 주변으로 구름길과 물을 품을 길 등 숲속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로서 안태각(安泰閣)·낙안당(樂安堂)·망원정(望遠亭)·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 8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뜰에는 해묵은 노송(老松)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서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린 계류(溪流) 한가운데에는 평대(平臺)를 쌓고 그 위에 서양식 건축기법이 더해진 유수성중관풍루를 세웠다. 4모지붕이나 기와를 씌우지 않은 색다른 지붕을 하고 있다.
사랑채인 대원군별장은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따로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래의 터 뒤쪽 바위에는 ‘三溪洞(삼계종)’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아서 원주인인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 살 당시에는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렀다.
뒤에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바꾸고 대원군의 호도 석파로 하였다고 한다. 소유권은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堣) 등으로 세습되어오다가 6·25 직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
서울성곽의 북서쪽밖에 자리 잡고 있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말기의 건축술이 조화된 대표적인 건축이다.
석파정과 선바위에 얽힌 이야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창의문 밖에 지은 삼계동 정자(三溪洞 亭子)는 당시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 삼계동이라 불리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지만 지금은 터널을 오가는 차량과 주위의 빼곡한 주택들에 가려 찾는 이가 드물다.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경관이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별장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했다.
처음에는 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장을 팔라고 했으나 그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군은 아들 고종에게 이곳을 다녀오라 권한다. 고종이 다녀간 후 김흥근은 '임금이 와서 놀다 간 곳에 감히 신하가 살 수 없다'며 다시는 이 별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별장은 대원군 소유가 되었다.
김흥근의 별장을 빼앗은 대원군은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고 한양 제일의 정원으로 가꾸었다. '석파'란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아호를 석파라 할 정도로 이 정자를 좋아했다. 정자 소유를 포기한 김흥근은 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대표하던 인물이다.
김흥근은 1825년(순조 25년) 30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 정9품)로 벼슬을 시작했다. 이후 여러 직위를 거쳐 1848년(헌종 14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다 대간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광양에 유배당하는 곡절도 겪는다.
1848년 7월 25일, 그의 탄핵 상소가 들어오자 헌종은 마치 기다린 듯 "너희들이 이제야 비로소 알았는가? 처지가 숭현(崇顯)하고 은총이 융중(隆重)한 자로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실로 조정의 불행이다"라며 반기었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횡포에 시달려온 임금의 속 깊은 분노가 그 구절에 담겨 있다.
그의 유배는 곧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그늘로 한 풍양 조씨들이 세력을 떨침을 의미했다. 그러나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1849년 12월 26일에 한성부판윤에 복직한다.그리고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거쳐 1852년(철종 3년) 1월 56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하지만 정세가 심히 복잡하고 혼란해 3월에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862년 민중봉기가 지속되자 김흥근은 삼정(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전세, 군포, 환곡을 뜻함)을 다스리는 국정최고책임자로 우뚝 섰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김흥근은 명예직인 돈녕부사로 밀려나 은거하다가 1870년(고종 7년) 75세 나이로 숨졌다. 석파정 소유가 서로 바뀌던 순간은 두 사람 사이 권좌의 교체를 의미한 것이다.
창의문에서 돈의문까지 성곽은 인왕산자락을 끼고 내려온다. 그런데 인왕산중턱 선바위가 묘한 기운을 풍긴다. 바위는 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까마귀들이 주변을 선회한다. 선바위는 성곽 바로 바깥이고 주변에는 무당들의 굿당들이 산재해 있다.
이 선바위에는 정도전과 무학대사 사이의 일화가 전한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끼고 도성을 쌓길 원했고 정도전은 그 반대였다. 두 사람이 한창 논쟁하던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선바위 옆으로는 눈이 다 녹은 신기한 일이 태조에게 보고됐다. 태조는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을 경계로 도성을 축성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래서 선바위가 성 바깥으로 놓이게 됐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은 선비들 책 짐이나 들어주게 됐다고 한탄했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선바위는 인왕산 동편과 서편 그 경계를 가르는 곳에 있다. 겨울철 해를 고스란히 받는 곳은 눈이 녹고 응달이 진 곳은 녹지 않는데 바위 주위에 그 경계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 것은 아닐까?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禪)'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무속 신앙이 깊어 오늘날 아이를 낳기 원하는 부인들이 찾아와서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창의문옛길, 50년만에 열린다!
서울 세종대로에서 경복궁과 청와대를 오른쪽에 끼고 부암동으로 오르는 좁은 언덕길. 이 길 끄트머리에 북악스카이웨이 고가도로가 하늘을 가리는 지점에서 오른쪽을 보면 오랜 성벽 위 기와지붕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아니면 지나치기 쉬울 만큼 외진 곳. ‘창의문(일명 자하문)’은 6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었다.한양도성 4소문(小門) 중 북서쪽에 있는 창의문은 ‘비운의 문’이다. “경복궁을 누르는 형국이니 문을 닫는 게 좋다”는 풍수가들의 주장으로 만들자마자 폐쇄됐다.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고 이름만 문인 세월만 200년. 이랬던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역사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1623년 3월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과 장단부사 이서 등이 이끈 반정군 1500명은 창의문을 뚫고 도성으로 진격했다.
평소 인적이 없어 방비가 약한 점을 노렸다. 야밤 침투는 한 차례 더 반복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창의문 옆 도로를 넘어 청와대로 돌진한 것.곡절 많은 창의문이 요즘 재조명받고 있다.
6월18일 서울 종로구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만난 박상빈 한양도성연구소장은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 제물포(인천)와 한양을 잇는 상업 길로 도성 문 중 가장 번화했던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달리 창의문은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이 문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건 성문 위 단정히 서 있는 문루(門樓)다. 박 소장은 “2008년 숭례문이 전소된 이후에는 1741년(영조 17년)에 만든 창의문 문루가 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며 “과거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던게 문을 보존하는 데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성문’으로서의 창의문의 가치도 주목 받고 있다. 박 소장은 “창의문 밖 평창동의 이름은 조선 후기 5군영 중 하나인 ‘총융청’의 군량창고로 쓰였던 ‘평창(平倉)’에서 유래한 것”이라며 “조선 후기의 창의문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군사 통로의 역할도 매우 컸다”고 분석했다.
종로구는 2015년 12월까지 창의문 앞 옛길 130m 구간(창의문로 10길)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원래는 “골목길이 좁고 불편하다”는 주민 의견을 반영해 단순히 길을 넓히고 아스팔트 포장만 새로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적도와 골목을 비교해본 결과 창의문 옛길과 지금 골목이 거의 동일한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종로구는 아스팔트 대신 황토색 포장재를 깔아 최대한 옛 풍경을 다시 살리기로 했다.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문화사적(백석동천, 사적 제462호)과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진 우수한 자연생지역으로서 도룡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계곡이다.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룡뇽'은 서울특별시자연환경보전조례에 의한 서울시 보호야생동물로서 백사실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가지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서울의 청정 계곡으로 도롱뇽이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깊은 숲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과 걸음을 막아서는 크고 작은 계곡의 정취는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버들치, 도롱뇽 등의 서식지인 만큼 계곡에 발을 담그지는 말고 그저 풍광만 탐할 것을 권한다.
세검정(洗劍亭)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인 세검정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 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었고, 부근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의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다.
석파랑(石坡廊)
홍지문(弘智門)근처 세검정(洗劍亭)삼거리의 인왕산(仁王山)자락끝머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석파랑(石坡廊)이 있다.
인왕산(仁王山)을 등지고, 북한산(北漢山)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있는 석파랑(石坡廊)은 궁중음식(宮中飮食)체험(體驗) 인증식당(認證食堂)으로 고급(高級)한정식(韓定食)식당(食堂)이다.
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식당(食堂)은 아니었고, 원래(原來)의 이름은 옥전장(玉田莊)이라고 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우리나라최고의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은 국회의원(國會議員)이 된 후 1958년 이 터에 기념비적(紀念碑的)인 한국전통가옥(韓國傳通家屋)을 짓고자 하였다.
그리 멀지않은 부암동(付岩洞)에 있는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별장(別莊)인 석파정(石坡亭)의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짓고, 자신의 집으로 33년 전에 지은 효자동(孝子洞)에 있는 옥전장(玉田莊)과 문옥루를 옮겨 한 자리에 모았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은 덕수궁(德壽宮) 돌담, 운현궁(雲峴宮), 선희궁(宣禧宮), 박영효 고택(朴泳孝 古宅), 김옥균 고택(金玉均 古宅) 등이 철거(撤去)될 때마다 자재(資材)를 이곳으로 옮겨와 담장을 두르고, 저택(邸宅)을 짓고, 정원(庭園)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만큼 다 완공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1989년 김주원(金周源)씨가 이곳을 사들여 1993년에 한식당을 열면서 석파랑(石坡廊)이 되었다.
출입문 입구에 있는 석파랑 입간판에는 "대원군이 사랑한 아름다운 별장"이라고 씌여있다.
석파랑 http://www.seokparang.co.kr/korea/main.html
흥선대원군의 별당(別堂)
석파랑 안으로 들어서면 언덕위에 만월창(滿月窓)이 보인다.
석파랑(石坡廊)의 부속채가 되어버린 이 별당(別堂)은 원래 대원군(大院君)의 별장(別莊)인 부암동(付岩洞) 석파정(石坡亭)의 건물 중에서 사랑채 부속건물(附屬建物)이었는데, "삼계동(三溪洞)"이란 각자(刻字) 바위 앞에 있던 것을 1958년 소전(素筌) 선생이 여기 홍지동(弘智洞) 그의 집 뒤 뜰 바위언덕으로 옮겨오면서 16년에 걸쳐 조성한 공간(空間)이다.
흥선대원군의 별당 http://www.seokparang.co.kr/korea/main.html
탕춘대성(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는 보조 성으로 지어졌다. 한양도성은 조선 초기시대에 축조된 것에 비해 북한산성은 후기인 숙종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을 통해 처참한 피해를 입었던 조선은 한성 방어를 위해 성곽들을 정비하게 됐고, 그렇게 하여 북한산성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의 이름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축조 된 순서를 정리해보면 ‘한양도성(조선 초기) ▶ 북한산성(조선 후기) ▶ 탕춘대성(조선 후기)’ 순이다.
홍지문은 그런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비록 4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성이었지만 탕춘대성도 있을 건 다 있는 성채다. 홍지문 옆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기에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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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생태문화탐방길 4.0km길잡이
09:07 풍경마을에서 20번 버스타고, 걸포공원후문에서 33번으로 환승
09:40 대화역에서 하차
09:45 대화역(9-1)에서 전철3호선 탑승
10:32 경복궁역에서 하차
10:40 경복궁역3번 출구버스정류장에서 1020번 버스탑승
교통정보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50여m지점 버스정류장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버스타고 자하문터널입구.석파정정류장나 자하문
고개에서 내린다.
배차간격: 1020(20분), 1711(10분), 7016(12분), 7018(16분), 7022(14분), 7212번(18분)
10:48 자하문고개에서 하차
10:50 자하문고개정정류장
10:53 창의문
11:00 창의문옛길
11:05 서울미술관
11:05-12:20 서울미술관과 석파정관람(1:15분)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미술관관람 후 미술관3층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다.
12:20 서울미술관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을 보기 위해서는 필히 서울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하고, 미술관입장료(관람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는 전시물에 따라 다르다는데, 지금 전시물은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3’로 일반(5,000원), 경로(3,000원)이다.
서울미술관관람 후 미술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250여m지점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다.
12:25 부암동주민센터
부암동주민센터갈림길에서 thanks latte와 BLUE.LIM/백양세탁 사잇길로 진입하면 150여m지점에 안평대군이용집터와 현진건집터가 있다.
12:33 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
안평대군이용집터는 사유지로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이 불가한데, 철문사이로 보니 폐허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철문 안쪽입구에는 안
내판이 세워져 있고, 바위에는 ‘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현진건집터는 잡초가 무성한 빈터로 남아있다.
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에서 왼쪽으로 50여m지점에 무계원이 있다.
12:44 무계원(武溪園)
조선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오진암(무계원의 옛이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이었다.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제3
공화국 정치사의 한 단면을 간직한 3대 요정이었던 오진암은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냈던 중요한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2010년 10월 관광호텔 신축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종루구가 호텔사업자 이솔트와 적극적으로 협의하여 이축
복원하기로 하고, 2012년 2월 종로구가 제공한 현 부지에 이솔트가 이축비용을 부담하여 사업을 개시하여, 종로구 예산과 서울시의 특별교
부금, 국토교통부의 지원 등으로 현재의 무계원(武溪園)을 완공했다.
무계원을 둘러보고 나와 오른쪽 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 방향으로 올라가 직진하면 180여m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곳에 반
계윤웅렬별장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2:55 반계윤웅렬별장
반계윤웅렬별장은 개인소유로 현재 사람이 살고 있어 관람이 불가하단다.
13:25 서시정/윤동주시인의언덕
13:42 자하문고개정류장
13:42 자하문고개정류장에서 7022번 버스탑승
13:47 통인시장에서 하차
14:00-14:30 점심식사(10,000원)
경복궁역2번 출구 먹자골목 ‘명료明瞭’(02-734-2828)에서 대구탕(7,000원), 막걸리(3,000원)등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14:44 경복궁역(2-4)에서 전철3호선 탑승
15:29 대화역에서 하차
15:37 대화역5번 출구버스정류장에서 33번 버스타고, 15:48 걸포공원후문에서 20번으로 환승
16:03 풍경마을에서 하차
서울종로구 세검정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라는 석파랑 별당(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나 방)은 2-3번 둘러보았는데, 석파랑 별당의 본체인 흥선대원군의 별서(농장이나 들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와 석파정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2007. 01/18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랑(石坡廊) http://blog.daum.net/sansol/1134
2010. 07/24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석파랑까지 http://blog.daum.net/sansol/662
2010. 09/12
인왕산-백사실계곡-석파랑까지 http://blog.daum.net/sansol/688
그래서 석파정과 흥선대원군의 별서를 둘러보기로 하는데, 석파정이 있는 곳은 개인소유라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석파정을 보기 위해서는 필히 서울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관람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는 전시물에 따라 다른데, 지금 전시물은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3’로 일반(5,000원), 경로(3,000원)이다.
서울미술관 왼쪽 뒤편에 석파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三溪洞’이라는 대문이 별도로 있지만, 이 문은 굳게 닫혀있다. 예술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사람이라도 석파정을 보기 위해서는 서울미술관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불합리하지만 어쩌겠나?
경복궁역3번 출구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타고 자하문고개에서 내려 창의문을 둘러보고, 복원예정인 창의문옛길을 거쳐 서울미술관에 도착한다.
서울미술관입구에 있는 면세점 앞에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세워져 있고, 면세점 안에는 외국인관광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면세점입구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서울미술관매표소가 있다.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으로 들어가 전시물을 관람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바로 석파정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왕 미술관입장료를 냈으니 예술방면은 무식하지만 전시물을 한번 감상해보기로 한다.
미술관으로 들어서려는데 한 아가씨가 뒤따라오더니 전시물에 대해 안내를 해주겠단다. 대충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꼼꼼히 둘러보게 생겼다.
1, 2층은 전시장이고, 3층은 카페와 공방이 있다.
1, 2층에서 전시물을 둘러보고 아가씨는 돌아가고, 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에서 카페와 공방 한 가운데를 질러가야 석파정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석파정 입구에는 아가씨가 지키고 있어, 미술관 들어갈 때 구입한 입장권을 검사한다. 입장권이 없으면 석파정은 들어갈 수가 없다.
서울미술관은 3층으로 되어 있지만 뒤쪽 벽면은 인왕산자락을 깍아 지었기 때문에 흙으로 메워져 있다.
그러니까 앞에서 보면 3층이지만 인왕산 쪽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인다. 즉, 3층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1층이 되는 셈이다. 바로 석파정이다.
석파정으로 들어서면 상상을 초월한 별천지가 펼쳐진다.
앞으로는 인왕산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서가 들어서있으며, 왼쪽에는 계곡을 건너 3층석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석파정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뒤쪽으로 돌아 서울미술관 3층 옥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3층 옥산은 잔디가 깔린 정원인데, 아주 훌륭한 전망대라고 할 수 있겠다.
사방으로 뻥-뚫려있어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맑은 가을하늘에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생각지도 못한 절경이다.
이제는 석파정을 둘러보기로 한다.
창의문 밖 부암동고개, 인왕산자락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별서는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보니 한마디로 ‘궁궐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안을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흥선대원군의 별서 반대편으로 계곡건너 3층석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물이 말라 흐르지는 않지만, 이 계곡을 보니 또 하나의 별천지가 생각난다. 인왕산자락에 2012년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수성동계곡이 있다.
서울종로구 옥인동 인왕산 기슭에 있는 수성동계곡은 예전에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 있던 곳으로 계곡일부가 콘크리트로 뒤덮였었는데, 수명이 다한 옥인시범아파트를 서울시가 매입하여 전통 보막을 만들고 향토수종 1만8477그루를 심어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속’ 인왕산 수성동계곡의 모습그대로 복원하여 2012년 7월11일 일반에 개방된 곳이다.
필자는 수성동계곡을 2번 정도 둘러본바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2012. 07/12
서울종로구 옥인동 인왕산수성동(水聲洞)계곡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1885
사 진 http://blog.daum.net/sansol/1886
2014. 01/11
서울종로구 근대예술가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서촌한옥마을길 5.4km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2457
사 진 http://blog.daum.net/sansol/2458
이야기가 자꾸만 옆으로 빠지는데, 다시 석파정이야기로 돌아와, 3층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암반 바위에 한문으로 흘려 쓴 글씨가 있는데, ‘소수운렴암 각자’란다.
필자는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이제는 계곡산책길을 따라 석파정과 너럭바위로 올라가 보자.
수 백년은 된 듯한 무섭게 생긴 소나무가 한 그루 길가에 서 있고, 그 뒤로 암벽에 액자모양의 틀 안에 ‘三溪洞’이라고 쓰여 있는데, ‘삼계동 각자’란다.
조금 더 올라가보자.
왼쪽 계곡에 오늘의 주인공인 ‘석파정(石坡亭)’ 정자가 있다. 석파정은 계곡위에 4각형 돌기둥으로 기초를 세운 평석교(平石橋) 위에 목재로 지어졌는데, 역시 4각형으로 아주 작고 아담한 아름다운 정자다.
한 가지 아쉽다면, 석파정이 세워져 있는 깊은 숲속의 계곡에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파정(石坡亭)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서(別墅)앞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로 대원군의 호를 따 ‘석파’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바위에 새겨진 소수운련암(巢水雲련菴)이라는 글 그대로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석파정(石坡亭)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로 청나라풍의 문살모양과 평석교(平石橋)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전통의 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석파정을 뒤로하고 조금 더 올라간다.
코끼리형상을 닮았다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인왕산의 특징을 잘 나타낸 암벽으로 수 십미터는 될 것 같다. 코끼리형상을 닮았다는데, 아무리 봐도 코끼리 닮은 구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석파정 둘러보기는 이곳 너럭바위까지다. 너럭바위에서 다시 올라온 길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올라온 길로 내려가면 흥선대원군의 별서왼쪽으로, 늙은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구름길’이라는 산책길이 있다. 이 길은 석파정 주변의 숲속을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숲속산책길이다.
필자는 이왕 왔으니 이 길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이 길은 흥선대원군별서-너럭바위-3층석탑-석파정입구에서 마무리 한다. 이렇게 석파정을 둘러보는데 1시간15분이나 걸렸다.
이제는 석파정입구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서울미술관을 나와 부암동생태문화탐방길을 걷기 위해 오른쪽 부암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걸어 올라간다. 서울미술관을-부암동주민센터까지는 250여m정도 된다.
부암동주민센터에서 다음목적지인 안평대군이용집터와 현진건집터로 이동하는데, 부암동주민센터 앞에서 thanks latte와 BLUE.LIM/백양세탁 사잇길로 진입하면 150여m지점에 안평대군이용집터와 현진건집터가 있다.
그런데 안평대군이용집터는 사유지로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이 불가한데, 철문사이로 보니 폐허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철문 안쪽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쪽으로 바위에는 ‘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안평대군이용집터 앞에 있는 현진건집터는 잡초가 무성한 빈터로 방치되어 있다.
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에서 왼쪽으로 50여m정도 내려가면 ‘武溪園(무계원)’이 있어 둘러보기로 한다.
조선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오진암(무계원의 옛 이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이었단다.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제3공화국 정치사의 한 단면을 간직한 3대 요정이었던 오진암은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냈던 중요한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란다.
2010년 10월 관광호텔 신축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종루구가 호텔사업자 이솔트와 적극적으로 협의하여 이축복원하기로 하고, 2012년 2월 종로구가 제공한 현 부지에 이솔트가 이축비용을 부담하여 사업을 개시하여, 종로구 예산과 서울시의 특별교부금, 국토교통부의 지원 등으로 현재의 무계원(武溪園)을 완공했단다.
무계원을 둘러보고 나와 오른쪽 안평대군이용집터/현진건집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로 직진하면 180여m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곳에 반계윤웅렬별장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반계윤웅렬별장은 개인소유로 현재 사람이 살고 있어 관람이 불가하단다.
부암동에서 의미 있는 곳들을 둘러보는 부암동생태문화탐방길은 안내와는 달리 석파정 이외에는 안평대군이용집터도, 현진건집터도, 반계윤웅렬별장도 볼 수가 없으니 전혀 의미가 없는 탐방길인 것 같다.
인왕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암동마을은 골목골목 볼거리가 참 많은 곳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부암동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한양성곽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그런데 성곽으로 올라가는 길은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다.
물어물어 길을 찾아 올라가는데, ‘반딧불 길‘을 만나고, 삼애교회에서 성곽길로 올라가는 길을 찾게 된다.
그렇게 부암동마을에서 인왕산스카이웨이로 올라선다.
인왕산스카이웨이를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가 도로건너편 청운공원으로 들어서고, 서시정에 올라 잠시 휴식하고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으로 이동한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니 남산을 비롯한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는 북한산도 날씨가 좋아 뚜렷하게 시야에 잡힌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을 끝으로 자하문고개로 내려서고, 자하문고개정류장에서 7022번 버스타고 통인시장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그 유명한 ‘토속촌삼계탕’집에서 삼계탕을 먹을까? 했는데, 대문 밖으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얼마나 긴지 알 수가 없어 그냥 돌아선다.
그래서 찾은 곳이 경복궁역2번 출구 먹자골목에 있는 ‘명료明瞭’(02-734-2828)라는 식당인데, 대구탕(7,000원)과 막걸리(3,000원) 등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명료明瞭‘의 음식 맛은 한 마디로 맛있는 집이다. 맛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암동생태문화탐방길 4.0km, 제1부 자하문고개-석파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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