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묘골마을 육신사탐방 왕복4.0km 2019. 05/01

산솔47 2019. 5. 19. 12:07

묘골마을 육신사탐방 적산교차로굴다리-육신사-적산교차로굴다리까지 왕복4.0km

2019. 05/01 수요일  



달성군자전거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적산교차로굴다리입구에서 왼쪽으로 굴다리를 지나 0.6km점에 달성삼가헌(達城三可軒)‘이 있고, 0.15km쯤 더 들어가면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있다. 달성삼가헌과 낙빈서원을 둘러본 다음 묘곡마을에서 사육신기념관-충효당-도곡재-육신사-태고정 등을 둘러보고 다시 적산교차로굴다리로 되돌아 나온다.


07:00-09:20

묘골마을 육신사탐방 적산교차로굴다리-육신사-적산교차로굴다리까지 왕복4.0km/2:20

course

적산교차로굴다리-달성삼가헌-낙빈서원-묘골마을입구-사육신기념관-도곡재-태고정-육신사-적산교차로굴다리

소요시간: 왕복4.0km/2:20, 평균속도(1.68km/시속)


적산교차로굴다리

달성군자전거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적산교차로굴다리입구에서 왼쪽으로 굴다리를 지나 0.6km점에 달성삼가헌(達城三可軒)‘이 있고, 0.15km쯤 더 들어가면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있다. 달성삼가헌과 낙빈서원을 둘러본 다음 묘곡마을에서 사육신기념관-충효당-도곡재-육신사-태고정 등을 둘러보고 다시 적산교차로굴다리로 되돌아 나온다.














달성삼가헌(達城三可軒)

달성삼가헌(達城三可軒)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조선후기의 고택으로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달성삼가헌 고택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는데,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는데, 중용 제9장에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낙빈서원(洛濱書院)

낙빈서원(洛濱書院)1679(숙종 5)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94(숙종 20)낙빈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숭절당(崇節堂)과 태고정(太古亭) 등이 있고, 묘우(廟宇)인 숭절당에는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태고정은 강당 겸 재사(齋舍)로 사용하고 있다.

태고정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사육신의 사적비가 그곳에 있으며, 별실에는 고자(庫子)가 기거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복원된 뒤부터는 8월 중정에만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4() 4()이다. 유물은 6·25사변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초서로 쓴 천자문과 서원기록문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사육신기념관






묘리(묘골)버스정류장

묘골이라고 불리는 묘골아름마을은 사육신의 한분이신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의 집성촌으로 구한말까지 300여 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다. 광복이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 호만 남아있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에 높직한 외삼문이 나오는데, 이곳은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육신사의 사당이다






묘골충효당


























도곡재(陶谷齋)

도곡재(陶谷齋)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로 이 건물은 원래 서정공, 박문현의 주택으로 1778(정조 2)에 건립하였으나, 19세기 중반에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라 하였다.











육신사(六臣祠)

육신사(六臣祠)는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1694)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고종 3(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나 1924년 낙빈서원을 재건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사당을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

사우건물인 숭정사에는 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인 중림(仲林, ?~1456)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고, 정면 5,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숭절당, 태고정(보물 제554),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1979년 건립)가 세워져 있다.











제13.14.15대 국회의장 송산 박준규생가터




충의사













태고정(太古亭)

태고정(太古亭)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에 있는 조선전기의 정자로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의묘(節義廟)99칸 규모의 종택(宗宅)에 딸린 별당 건물이다.

태고정(太古亭)1479(성종 10)에 박팽년의 후손으로 힘겹게 살아남은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광해군 6)에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이후인 1614년에 다시 지어진 건물 이지만, 조선전기 세웠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여 조선전기 건축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박두율여사생가(이병철회장의 부인)











육신사에서 되돌아나오면  다시 들린 달성삼가헌(達城三可軒)





















4대강국토종주길 낙동강20구간 강정고령보-달성보까지 23.2km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4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