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2코스 초지대교-강화대교까지 20.8km길잡이
2021. 09/15 수요일
강화-김포를 잇는 평화누리자전거길 연결을 위해 구.강화대교(江華大橋)가 개방되었다. 오늘은 강화나들길2코스 초지진-갑곶돈대까지 17.0km를 걷고자 하는데, 교통편의상 들머리와 날머리를 포함하면 초지대교-강화나들길-구)강화대교-성동검문소까지 20.8km나 된다.
07:03-13:36(6:33분)
강화나들길2코스 초지대교-강화대교까지 20.8km/6:13분
course
초지대교정류장-초지진(0.8km)-초지진선착장-덕진교-대원군경고비-덕진돈대-남장포대-덕진진(2.8km)-광성포대-용두돈대(3.0km)-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광성보(0.5km)-광성돈대-광성보삼거리-강화전성.강화외성-오두돈대(3.1km)-화도교-화도돈대(1.1km)-용당돈대-용진진(3.5km)-더러미포구-순국터-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3.0km)-강화통제영학당옛터-강화외성진해루-구)강화대교-성동검문소정류장(3.0km)
소요시간 : 20.8km/6:13분, 평균속도(3.32km/시속), 점심식사(20분)
강화도에는 섬을 한 바퀴 돌아가면서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진(鎭), 돈대(墩臺), 포대(砲臺) 등의 방어시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6.9km구간에 염하강변을 따라 문화적가치가 높은 시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2010. 02/07
강화나들길제2구간 바닷가돈대길 강화역사관-초지진까지 21.0km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483
사 진: 제1부 강화역사관-쌍충비까지 http://blog.daum.net/sansol/484
제2부 쌍충비-초지대교까지 http://blog.daum.net/sansol/485
2015. 07/01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3011
사 진: 제1부 갑곶돈대-용진진까지 http://blog.daum.net/sansol/3012
제2부 용진진-광성보까지 http://blog.daum.net/sansol/3013
제3부 광성보-덕진진까지 http://blog.daum.net/sansol/3014
제4부 덕진진-초지진까지 http://blog.daum.net/sansol/3015
2018. 01/02
강화나들길2코스 바닷가돈대길 초지대교-강화대교까지 19.7km
길잡이: https://blog.daum.net/sansol/3971
사 진: 제1부 초지대교-광성보삼거리까지 7.8km https://blog.daum.net/sansol/3972
제2부 광성보삼거리-성동검문소까지 11.9km https://blog.daum.net/sansol/3973
초지진(草芝鎭)
초지진은 해상으로 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로 고종8년(1871년)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침입한 미국로저스아세아함대와 고종12년(1875년) 침입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다.
초지진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측의 함포공격으로 일부가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의 운양호침공시 조선수비병과 일본군사이의 포격전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시대 대포 1문만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초지진의 성벽과 400여 년 동안 초지돈대를 지키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는 격전 중에 날아온 포탄파편으로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덕진돈대(德津墩臺)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속한 돈대중의 하나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요새지다.
경고비(警告碑)
경고비는 조선 고종4년(1867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참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은 비석이다.
남장포대(南障砲臺)
남장포대는 덕진진에 속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학사재(學思齋)
강화도 덕진진 옆에 위치한 학사재는 재미사업가 김영훈씨가 사비를 들여 전통건축기법으로 지은 집으로 한국 문화창달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2000년 5월에 착공해 2002년 5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 한옥 3동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한옥이 전통기법과 콘크리트가 혼합된 3층 높이의 "한옥마름복판"으로 꾸며진 곳으로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입장은 불가하다.
덕진진(德津鎭)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덕진진은 고려시대부터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충지이자 강화12진보 중 하나로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해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요충지에 있는 진이다.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이름이 높았다. 병인양요(1866)때는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신미양요(1871)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덕진진에서 벌어졌는데, 이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해 결국 강화도는 점령당했다.
1976년 무너진 성곽과 돈대(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고 적의 동태를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 포대 등을 복원하고 대포도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현재 덕진진에 가면 남장포대를 볼 수 있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해상에서 적에 노출되지 않은 반월형 천연 요새를 확인할 수 있다.
덕진진-생활의달인 ‘어제연숯불장어’입구까지 강화나들길 약 1.6km는 길이 애매해 길 찾아 헤매다가 도로를 따라 걷는다.
광성포대(廣城砲臺)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로 광성보에 속해있는데, 광성보에는 광성포대 외에도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광성돈대 등이 속해 있다.
용두돈대(龍墩頭臺)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다. 용두돈대에는 ‘江華戰蹟地淨化記念碑(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손돌목(孫乭項)
손돌목은 강폭이 좁고, 이곳을 흐르는 물길(염하)은 빠르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서고, 손돌이 손돌목(염하)을 건너는 길안내를 맡았다.
손돌목의 급한 물살로 뒤집힐 것만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세지는 물살 가운데로 배를 몰아간다.
불안한 임금은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손돌은 죽기 전에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를 따라가던 배는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임금이 강화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말하기를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내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강화도 광성보(용두돈대)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손돌의 무덤이 있는데, 평화누리길1코스 대명항-문수산성입구까지 15.4km를 걷다보면 손돌의 무덤을 볼 수가 있다.
2011. 11/22
평화누리길1코스 대명항-문수산성입구까지 15.4km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1659
사 진: http://blog.daum.net/sansol/1660
2020. 09/22
김포둘레길4코스.평화누리길1코스 대명항-성동검문소까지 14.9km
길잡이: https://blog.daum.net/sansol/4917
사 진: https://blog.daum.net/sansol/4918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신의총은 조선 고종8년(1871년, 신미양요) 광성보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쌍충비(雙忠碑)
쌍추비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외 59인의 순절비다.
광성보(廣城堡)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강화 12진보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고려시대 몽고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을 쌓아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이를 고쳐 쌓았고 효종 9년(1658)에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가 완성되었다.
신미양요(1871)때 광성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고, 현재 광성보에는 어재연 등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속한 3개 돈대중 하나로 숙종5년(1679년)에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
강화외성(江華外城)
강화외성은 고려시대 강화도읍기에 강화의 동쪽해안 23km에 걸쳐 축조된 토성인데, 조선시대에도 해안방어를 위하여 숙종17년(1691년)에 강화외성을 축조한바 있다.
강기운의교비(姜寄云義橋碑)
강기운(姜寄云)은 강화군 불은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본인의 재산을 털어 위로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를 만들고, 아래로는 바닷물의 역류를 막을 수 있는 수문을 만들었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감사의 뜻을 모아 공적비를 세웠다. 이 수문은 1990년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두돈대(鼇頭墩臺)
오두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화도돈대(花島墩臺)
화도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강화도 해안에 쌓은 여러 돈대중 하나로 해안절벽 쪽으로 장축을 기댄 형태의 돈대다.
용당돈대(龍堂墩臺)
용당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속해 있다.
용진진(龍津鎭)
용진진은 숙종 42년에 설치되었고 3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 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되었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의 있었다고 한다.
이 진에서는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 돈대를 관리하였다.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문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하였다.
갑곶돈대(甲串墩臺)
돈대(墩臺)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 방어시설로 갑곶돈대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강화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옛터
조선말기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인천시 강화도 갑곶진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은 1893년 고종이 설립한 한국최초의 근대적인 해군사관학교이다.
통제영학당이란 경상남도 통영에 위치한 조선수군의 최고 지휘기구인 통제영(統制營) 산하의 학당(學堂)이라는 뜻이다.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 또는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이라고도 한다.
사관생도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고, 영국해군대위인 윌리엄 콜웰(William H. Callwell)과 하사관 제임스 커티스(James Curtis)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이듬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폐교되었다.
강화외성 진해루(鎭海樓)
사적452호, 강화외성의 6개 문루 중 하나인 강화대교와 舊(구)강화대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진해루(鎭海樓)가 복원되었다.
진해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강화도로 진입하는 관문으로 내륙에서 염하강을 건너 갑곶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오는 갑문역할을 했던 가장 중요한 길목의 문루였다.
참고로, 강화외성은 강화도 동해안 일대 방어를 목적으로 고려 고종20년(1233)에 축조한 성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그 길이가 약 23km에 이른다.
강화외성에는 6개의 문루가 있었는데, 조해루(연미정), 복파루(연미정과 강화대교 사이), 진해루(강화대교와 구강화대교 사이), 참경루(용진진), 공조루(덕진진), 안해루(광성보) 등이다.
구)강화대교
구)강화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성내리를 연결한 다리로 길이 694m, 폭 10m이다.
구.강화대교는 1965년7월에 착공하여 1970년1월에 개통되었는데, 이 다리를 통해 국도가 강화군까지 연결되었는데,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김포쪽 나루에서 밀물 때를 기다렸다가 나룻배에 버스를 싣고 강화도까지 왕래했다.
물살이 급해 사고가 잦았던 염하에 이 다리가 가설되자 배로 30분 정도 걸리던 시간이 도로를 이용하여 3분으로 단축되었다.
특히 강화일대가 안보·사적관광지로 중요시되면서 지역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서울 도심부까지의 소요시간도 1시간30분 정도로 단축되었다. 1997년12월 새로운 강화대교가 준공되면서 이 다리는 폐쇄되었다.
그 동안 폐쇄되었던 구.강화대교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개통되면서 08:00-18:00분까지 통행이 가능해졌다. 구.강화대교를 건너다보면 중간쯤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강화나들길2코스 초지대교-강화대교까지 20.8km, 제1부 초지대교-광성포대까지 5.7km
https://blog.daum.net/sansol/5160
강화나들길2코스 20.8km, 제1부 초지대교-광성포대까지 5.7km 202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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