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강화나들길2코스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길잡이 2015. 07/01

산솔47 2015. 7. 6. 16:59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

2015. 07/01 수요일

 

 

오래전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물이 함께 모여 흐르는 염하강변을 따라 강화나들길 2코스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삥-둘러 만든 5753돈대 중에서 317돈대를 만나게 된다.

오늘은 2010. 02/07일에 걸었던 강화나들길 2코스 갑곶돈대-초지진까지 17.0km를 다시 한 번 더 걷고자 하는데, 들머리인 강화대교-갑곶돈대까지 1.0km와 날머리인 초지진-초지대교까지 0.8km등 총 18.8km를 걷게 된다.

 

트래킹코스:

청소년수련관정류장-갑곶순교성지.천주교인천교구-갑곶돈대(1.0km)-강화전쟁기념관-순국터-더러미포구-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강화전성-광성돈대-손돌목돈대-용두돈대-광성포대-남장포대-덕진진-덕진교-초지진선착장-초지진(17.0km)-초지대교버스정류장(0.8km)

소요시간 : 18.8km/6:55, 평균속도: 2.7km/시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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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 호국돈대길 갑돚돈대-초지진까지 17.0km

강화도에는 섬을 한 바퀴 삥- 돌아 5753돈대의 방위시설이 있다.

그 중에 제2구간인 강화대교에서 초지대교 사이에는 염하강변을 따라 수도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담당했던 317돈대가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진은 현재의 중령정도가 지휘하는 군대였고, 보는 소령정도가 지휘하는 군대였으며, 진과 보는 각각 3~5개 정도의 돈대를 관할했다.

나들길 왼쪽으로는 염하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김포 문수산과 대명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어마을이 밀집해 있는 용진진은 홍예만 남은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초지진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포탄에 맞은 상흔을 간직한 노송을 볼 수 있는데,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격랑을 그 나무에서 느낄 수 있다.

강화나들길 http://www.nadeulg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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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길잡이

07:50 풍경마을에서 388번 버스타고, 대우푸르지오에서 내려 지경에서 88번으로 환승

        교통정보

        지경에서 88, 96번 버스타고 강화대교건너 청소년수련관정류장에서 내린다.

        배차간격: 88(15), 96(25)

08:45 청소년수련관정류장에서 하차

 

 

08:45-16:10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6:55, 점심식사(30)

08:45 청소년수련관정류장

08:58 갑곶순교성지.천주교인천교구

09:02 ()강화대교

09:10 강화전쟁기념관.갑곶돈대매표소

09:28 갑곶돈대

09:42 갑곶교

09:53 순국터

09:56 더러미포구

10:25 용진진

10:38 강변쉼터

10:40-11:10 강변쉼터에서 점심식사(30)

11:20 용당돈대

11:45 화도돈대

12:08 오두돈대

12:17 강화전성

13:04 광성보입구삼거리

13:15 광성돈대

13:40 손돌목돈대

13:47 용두돈대

13:54 광성포대

14:34 덕진진매표소

14:52 남장포대

14:56 덕진진

15:00 경고비

15:13 덕진교

15:37 초지진선착장

15:48 초지진

16:10 초지대교버스정류소

 

16:10 초지대교버스정류소에서 60-2번 버스타고, 복합환승센터에서 60-3번으로 환승, 청송마을에서 55번으로 환승, 대우푸르지오에서 388번으로

        환승

        교통정보

        초지대교버스정류소에서 60-2, 60-5, 700, 700-1번 버스타고, 복합환승센터에서 서울방향버스로 환승, 지경에서 내린다.

17:02 풍경마을에서 하차

 

 

 

 

강화나들길 중에서 진, 돈대, 포대 등 옛 군사시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을 다시 한 번 더 걷는다.

5년 전 강화나들길2코스를 걸었을 때는 2월로 겨울이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은 7월로 여름의 문턱이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2010. 02/07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갑곶돈대-초지진까지 17km/5:50

길잡이 http://blog.daum.net/sansol/483

1부 강화역사관-쌍충비까지 http://blog.daum.net/sansol/484

2부 쌍충비-초지대교까지 http://blog.daum.net/sansol/485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은 갑곶돈대-초지진까지 17.0km, 갑곶돈대-온수사거리까지 5.0km20.0km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오늘 걷고자 하는 길은 갑곶돈대-초지진까지는 17.0km와 들머리, 날머리를 포함하여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

 

2코스는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진과 돈대, 그리고 포대의 최전선인 강화외성(江華外城)길이다.

강화외성은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으로, 강화읍 월곶리 연미정에서 길상면 초지리까지 약 23km에 걸쳐 쌓은 성인데, 지금은 이 성이 해안산책로 아래 땅속에 묻혀 있다.

 

서울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 청소년수련관정류소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건너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갑곶돈대 입구에서 왼쪽 갑곶순교성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강화나들길2코스는 갑곶돈대에서 시작하는데, 먼저 천주교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런데 갑곶순교성지 앞에서 ()강화대교로 가는 길이 열려있어 살짝 들여다보니 자전거길과 보행로가 그려져 있다.

아마도 ()강화대교를 개방하기 위해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갑곶순교성지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 나와 이제는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로 진입한다.

예전에 강화역사관이 지금은 강화전쟁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매표소를 지나 먼저 강화전쟁박물관을 둘러보고, 갑곶돈대로 올라간다.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은 이곳 갑곶돈대(甲串墩臺)에서 부터 시작한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甲串墩臺)는 고려 고종19(1232)부터 원종11(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22(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1679)에 축조되었다.

 

갑곶돈대까지 둘러보고 다시 정문으로 나와 갑곶교를 건너 아름다운 꽃이 핀 제방길을 걷는다.

이 제방길은 강화외성길이다.

 

제방길을 걷다보면 더러미포구 못 미쳐에서 殉國를 만난다.

순국터는 19078월 일제에 의해 한국군대(강화진위대)의 강제해산으로 강화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주모자로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교인 김동수권사, 동생 영구성도, 그의 4촌 김남수권사를 주모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김동수권사 3형제를 포승줄로 묶은 채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이곳 더러미해변에서 긴 칼로 후려쳐서 즉결 처형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순국터를 조성하고 비를 세웠다.

 

순국터를 지나면 더러미포구에 도착한다.

더러미포구는 갯벌 장어구이로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별로 보이지가 않는다.더러미포구를 지나 잠시 도로를 걷다가 다시 제방길로 들어선다.

길도 좋고, 경치도 좋다.

날씨가 맑아 염하강 건너 문수산을 비롯한 김포의 경치까지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용진진(龍津鎭)에 도착한다.

용진진은 강화해협(염하)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로 101명의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강화외성의 일부분으로 조선 효종7(1656)에 만들었다.용진진은 북쪽의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남쪽의 용당돈대를 관리하였는데, 세 돈대 모두 배가 닿는 포구였다.

 

용진진(龍津鎭)은 문루를 복원했고, 둥글게 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참으로 예쁘게 생겼다.

용진진을 지나면 잠시 도로의 갓길을 걷는다.

도로변 쉼터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소주도 한잔 곁들인다.

식사도 혼자 먹으니 30분이면 가능하다.

 

쉼터를 지나면 숲길로 들어서는데, 해변의 야산을 따라 조성된 숲길은 550m에 이른단다.

숲길을 지나는데, 10여 마리의 닭이 숲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숲속에 왠 닭?

야생 닭인가? 아니면 집닭인가?

도망가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어느 집 방목닭장에서 빠져 나온 집닭인가보다.

 

숲속정상에서 용당돈대(龍堂墩臺)를 만난다.

강화 용진진의 예하 돈대중 남단의 광성보로 이어지는 지점의 용당돈대는 산 정상에 타원형으로 구축되어 염하를 감시하기 용이하게 만들어졌다.

 

용당돈대를 지나서 잠시 숲길을 계속 걷다가 다시 제방길로 올라선다.

이곳 제방길에는 매실나무가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는데, 노랗게 익어가는 열매가 먹음직스럽다.

매실길을 지나니 이제는 붓꽃길이다.

그런데 붓꽃의 개화 시기는 지금이 아닌가보다.

꽃이 하나도 피지 않았다.

 

터만 남아있는 화도돈대(花島墩臺)에 도착한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다. 화도돈대는 병자호란 후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숙종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화도돈대을 지나고 화도교를 건너 다시 키가 아주 작은 코스모스가 식제된 제방길을 걷는다.

아직 여름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코스모스는 벌써 꽃을 피우고 있다.

오두돈대 입구에 있는 쉼터에서 잠시 휴식한다.

 

쉼터를 지나 오두돈대를 향해 야산으로 올라가고, 정상에서 오두돈대(鼇頭墩臺)를 만난다.

강화해협으로 비쭉 고개를 내민 불은면 오두리의 나즈막한 산 속에 오두돈대가 숨어있다.

지형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를 닮은 언덕 위에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오두돈대는 원형형태로 그 지름이 32m에 달한다.

마치, 로마시대의 넓은 원형경기장의 축소판처럼 생겼다.

 

오두돈대에서 도로에 내려서면 강화전성(江華塼城)이다.

강화전성은 강화도의 동쪽해안에 축조된 강화외성의 일부구간으로 고려 고종때 흙으로 쌓아 만든 토성을 조선시대 영조19(1743)에 강화유수 김시혁이 벽돌로 다시 고쳐 쌓은 벽돌성이다.

강화전성은 정조18(1794)에 벽돌을 사용한 수원화성보다 50여년이나 앞선 시기에 축성한 것이다.

 

강화전성은 벽돌로 복원하고 있는데,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것 같다.

비록 짧은 구간에 남아있지만 아름다운 강화전성을 지나 잠시 도로를 걷다가 도로변 쉼터에서 강변으로 내려서 갯벌위에 개설된 나들길을 걷고, 다시 제방길로 이어간다.

 

이 제방길은 강화전성을 지나 광성보입구까지 끝없이 이어지는데 2.0km나 된다.

제방길을 지나면 광성보입구삼거리에서 광성보(廣城堡)로 진입한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강화외성의 일부분이다.조선 효종9(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숙종5(1679)에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와 함께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고종3(1866)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 고종8(1874) 신미양요 때는 미국의 아시아함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곳으로 어재연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광성보로 들어서면 왼쪽에 광성돈대(廣城墩臺)가 있고, 광성돈대와 이어져 있는 성문인 안해루(按海樓)가 있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중 하나로 숙종5(1679)에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숭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3일 만에 완공하였다.

 

광성돈대를 둘러보고 나와 안해루를 지나 손돌목돈대.용두돈대를 향해 올라간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산책로는 바람까지 불어 시원하고 걷기 좋다.

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雙忠碑)를 만난다.

쌍충비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장군 외 59명의 순절비다.

 

쌍충비(雙忠碑) 아래에는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이 있다.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은 조선 고종8(1871.신미양요) 광성보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광성보 정상에 있는 원형의 손돌목돈대(孫乭墩臺)로 올라간다.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는 돈대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손돌목은 김포와 강화사이의 염하강 폭이 제일 좁은 곳으로 물살이 제일 센 곳이다.

손돌목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는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그제야 깨닫고,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우게 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20일경에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풍이라 하며, 매년음력 1020일에 손돌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 이라고 하는데, 손돌목돈대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면 염하강으로 쭉-삐져나온 곳에 용두돈대가 있고, 용두돈대 앞의 염하가 손돌목이다.

손돌의 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인 김포 덕포진에 있다.

 

덕포진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강변 언덕위에 있는데,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의 용두돈대와 마주하고 있다.

덕포진과 용두돈대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역할을 했던 이곳 손돌목은 지금도 물살이 매우 세다.

덕포진은 조선 선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덕포진에는 3곳에 포대와 파수장터 그리고 손돌의 묘가 있다.

 

손돌목돈대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내려가 염하강으로 쭉- 삐져나온 끝에 위치한 용두돈대(龍頭墩臺)로 향한다.

용두돈대는 주변경치와 함께 어우러져 광성보에서 제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고로, 용두돈대는 강화나들길2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용두돈대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5(1679)에 만들었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성벽을 복원하면서 용두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면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고, 뒷면은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있다.

용두돈대 앞의 염하는 손돌풍으로 이름난 손돌목이다.

염하건너 동남쪽으로 보이는 곳이 김포의 덕포진이고, 덕포진 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언덕위에 손돌의 묘가 보인다.

 

용두돈대를 뒤로하고 나와 이제는 염하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광성포대로 향한다.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다.

 

광성포대를 지나서는 해안숲길이 이어지는데, 해안숲길은 도로까지 500m에 이른다.

잠시 도로를 걷고, 다시 갯벌길을 걸어 풀이 무성한 제방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 염하건너편에는 김포 덕진진의 손돌묘가 보아고, -만치 앞에 초지대교도 시야에 들어온다.

한참동안 제방길을 걸어 덕진진(德津鎭)으로 올라선다.

덕진진은 강화12진보(鎭堡)의 하나로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현종7)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3)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전등사 뒷산에 있는 삼랑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덕진진으로 들어서 공조루를 지나 염하강변에 설치된 남장포대(南障砲臺)로 내려선다.

남장포대는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8포대 중의 하나로 숙종5(1679)에 축조되었으며, 덕진진의 관할하에 있었다.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이용하여 염하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달 모양의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고종8(1871)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미국의 함포를 당해내지 못하고 성곽과 포대가 모두 파괴되었다.

 

남장포대에는 대포 여러 문이 전시되어 있다.

남장포대를 뒤로하고 언덕위로 올라서면 덕진돈대(德津墩臺)가 있고, 덕진돈대 뒤편으로 염하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흥선대원군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덕진돈대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5(1679)에 만들었다.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속한 돈대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염하를 지키는 중요한 돈대였다.

조선 고종8(1871) 신미양요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세아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으로, 신미양요 때 파괴된 것을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경고비(警告碑)

덕진돈대를 돌아가면 염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한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이 경고비는 대원군의 지령으로 1866년 병인양요때 작성하여 주요해안에 세워진 쇄국정책을 표현하는 비석이다.

 

덕진돈대와 경고비를 뒤로하고 숲길을 내려오면 염하강변 갯벌길을 걷는다.

이 갯벌길은 갯골이 가로막고 있어 직진하지 못하고, 덕진교까지 갯골을 삥- 돌아가야 한다.

덕진교를 건너고 다시 갯골을 따라 염하강변 제방길로 들어선다.

 

이 제방길은 덕진교-초지선착장까지 1.5km나 된다.

염하강 건너편으로 대명항과 함상공원이 보이는 제방길을 걷고, 초지선착장에 도착한다.

초지선착장에서 강화나들길2코스 종점인 초지진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초지진을 뒤로하고 조금만 걸으면 오늘트래킹의 종점인 초지진(草芝鎭)에 도착한다.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인 초지진(草芝鎭)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7(1656)에 구축한 요새다.

1866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함대와 1871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함대, 그리고 18758월에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다.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운 곳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9세기 후 아시아로의 팽창정책을 추진하던 미국은, 1866년 우리나라의 대동강 유역에 침입했던 제너럴셔먼호를 우리관군이 공격했던 사건을 빌미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압도적인 무기의 차이로 광성보에서의 전투에서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어재현 장군의 부대가 전멸했으며, 부대기인 '수자기(帥字旗 : 대원수를 상징하는 깃발)'를 빼앗기게 된다.

당시 우리가 가진 대포는 그야말로 쇠공이 날아가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쇠공을 피하면 그 근처에는 피해가 없었다.

반면 미군이 사용하던 대포는 오늘날의 대포와 마찬가지로 땅에 떨어지면 파편이 퍼지며 산산이 부서져 살상 반경이 우리 것에 비해 훨씬 큰 신형 대포였다.

이러한 화력의 큰 차이로 인해 광성보와 초지진을 지키던 어재현 장군의 부대는 전멸하게 된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과 조선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초지진을 둘러보고 나와 초지대교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오늘트래킹을 모두 마친다.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중에서 제1부 제1부 갑곶돈대-용진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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