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강화나들길2코스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제3부 광성보-덕진진까지 2015. 07/01

산솔47 2015. 7. 7. 18:04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중에서 제3부 광성보-덕진진까지

2015. 07/01 수요일

 

 

오래전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물이 함께 모여 흐르는 염하강변을 따라 강화나들길 2코스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삥-둘러 만든 5753돈대 중에서 317돈대를 만나게 된다.

오늘은 2010. 02/07일에 걸었던 강화나들길 2코스 갑곶돈대-초지진까지 17.0km를 다시 한 번 더 걷고자 하는데, 들머리인 강화대교-갑곶돈대까지 1.0km와 날머리인 초지진-초지대교까지 0.8km등 총 18.8km를 걷게 된다.

 

트래킹코스:

청소년수련관정류장-갑곶순교성지.천주교인천교구-갑곶돈대(1.0km)-강화전쟁기념관-순국터-더러미포구-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강화전성-광성돈대-손돌목돈대-용두돈대-광성포대-남장포대-덕진진-덕진교-초지진선착장-초지진(17.0km)-초지대교버스정류장(0.8km)

소요시간 : 18.8km/6:55, 평균속도: 2.7km/시속

 

 

광성보(廣城堡)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강화외성의 일부분이다.

조선 효종9(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숙종5(1679)에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와 함께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고종3(1866)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 고종8(1874) 신미양요 때는 미국의 아시아함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곳으로 어재연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중 하나로 숙종5(1679)에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숭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3일 만에 완공하였다.

 

 

 

 

 

 

 

 

 

안해루(按海樓)

 

 

 

 

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쌍충비(雙忠碑)

쌍충비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장군 외 59명의 순절비다.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은 조선 고종8(1871.신미양요) 광성보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손돌목돈대(孫乭墩臺)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는 돈대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손돌목돈대에서 바라 본 손돌목

 

 

 

 

김포 덕포진의 언덕위에 있는 손돌의 묘

 

 

 

 

신미양요때 조선군과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광성보의 모습

1. 미군에게 점령당한후 손돌목돈대와 조선군시체들(1871.6.11)

2. 손돌목돈대의 외부모습

3. 용두돈대의 원경

 

 

 

 

용두돈대로 내려가는 길

 

 

 

 

손돌목

손돌목은 김포와 강화사이의 염하강 폭이 제일 좁은 곳으로 물살이 제일 센 곳이다. 손돌목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는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그제야 깨닫고,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우게 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20일경에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풍이라 하며, 매년음력 1020일에 손돌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 이라고 하는데, 손돌목돈대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면 염하강으로 쭉-삐져나온 곳에 용두돈대가 있고, 용두돈대 앞의 염하가 손돌목이다.

손돌의 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인 김포 덕포진에 있다.

 

덕포진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강변 언덕위에 있는데,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의 용두돈대와 마주하고 있다.

덕포진과 용두돈대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역할을 했던 이곳 손돌목은 지금도 물살이 매우 세다.

덕포진은 조선 선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덕포진에는 3곳에 포대와 파수장터 그리고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두돈대는 주변경치와 함께 어우러져 광성보에서 제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용두돈대는 강화나들길2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용두돈대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조선 숙종5(1679)에 만들었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성벽을 복원하면서 용두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면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고, 뒷면은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있다.

용두돈대 앞의 염하는 손돌풍으로 이름난 손돌목이다.

염하건너 동남쪽으로 보이는 곳이 김포의 덕포진이고, 덕포진 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언덕위에 손돌의 묘가 보인다.

 

 

 

 

 

광성포대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다.

 

 

 

제방길을 걸으면서 바라 본 초지대교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대교-초지대교까지 18.8km중에서 제4부 덕진진-초지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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