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강화나들길2코스 19.7km, 제1부 초지대교-광성보삼거리까지 7.8km 2018. 01/02

산솔47 2018. 1. 6. 11:45

강화나들길2코스 초지대교-.강화대교-성동검문소까지 19.7km, 제1부 초지대교-광성보삼거리까지 7.8km

2018. 01/02 화요일

 

 

강화~김포를 잇는 평화누리자전거길 연결을 위해 구.강화대교(江華大橋)가 개방되어 이 길을 걷고자하는데, .강화대교(700m)만은 너무 짧아 강화나들길2코스 갑곶돈대-초지진까지 16.9km를 포함하여 초지대교-.강화대교-성동검문소까지 19.7km를 걷고자 한다.

course

초지대교버스정류장-초지진(0.8km)-초지진선착장-덕진교(2.3km)-대원군경고비-덕진돈대-남장포대-덕진진-광성포대-용두돈대(3.4km)-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광성보-광성돈대-광성보삼거리(1.3km)-강화전성.강화외성-오두돈대-화도교(3.7km)-화도돈대-용당돈대-용진진(2.9km)-더러미포구-순국터-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3.3km)-.강화대교(0.7km)-성동검문소삼거리-성동검문소버스정류장(1.3km)

소요시간 : 19.7km/6:06, 평균속도(3.24km/시속)


초지대교버스정류장



들머리

초지대교버스정류장에서 등대장어집방향으로 진입하면 바닷가 초지대교 아래에서 강화나들길을 만나고, 왼쪽 강화대교 방향으로 강화나들길을 따라 가면 0.8km지점에서 초지진에 도착한다.



초지진(草芝鎭)

초지진(草芝鎭)해상으로 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7(1656)에 구축한 요새로 고종8(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침입한 미국로저스아세아함대와 고종12(1875) 침입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다.

초지진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측의 함포공격으로 일부가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의 운양호침공시 조선수비병과 일본군사이의 포격전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시대 대포 1문만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초지진의 성벽과 400여 년 동안 초지돈대를 지키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는 격전 중에 날아온 포탄파편으로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초지진항







초지진항에서 바라 본 강 건너 김포의 대명항과 대명항함상공원





초지대교




















덕진돈대(德津墩臺)

덕진돈대(德津墩臺)는 덕진진에 속한 돈대중의 하나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요새지다.




경고비(警告碑)

경고비(警告碑)는 조선 고종4(1867)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참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은 비석이다.






경고비에서 바라 본 용두돈대



남장포대(南障砲臺)

남장포대(南障砲臺)는 덕진진에 속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장포대에서 바라 본 손돌목과 용두돈대




학사재(學思齋)

남장포대에서 덕진진쉼터에 올라서니 아까 보았던 작은 연못 너머로 숲속에 한옥이 보이는데, 무슨 건물인가? 궁금해 가보려 했으나 길이 안 보인다. 나중에 집에 도착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학사재(學思齋)란다.

학사재(學思齋)강화도 덕진진 산기슭에 전통기법과 현대생활을 조화시킨 개인 한옥살림집인데,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한옥은 재미교포사업가 김영훈씨의 의뢰로 목수(木壽) 신영훈씨와 도편수 조희환씨, 건축박사 김도경씨 등 장인들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16개월간의 공사 끝에 지은집이란다.








덕진진(德津鎭) 공조루(控潮樓)

덕진진(德津鎭)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水營)에 속한 진이었고, 산하에 덕진돈, 남장포대 등을 두고 있다.






















광성포대(廣城砲臺)

광성포대(廣城砲臺)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로 광성보에 속해있는데, 광성보에는 광성포대 외에도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광성돈대 등이 속해 있다.











용두돈대(墩頭臺)

용두돈대(墩頭臺)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다. 용두돈대에는 江華戰蹟地淨化記念碑(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江華戰蹟地淨化記念碑(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는 조선 숙종5(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손돌목(孫乭項)

용두돈대 앞바다가 바로 손돌목(孫乭項)이다. 손돌목(孫乭項)은 강폭이 좁고, 이곳을 흐르는 물길(염하)은 빠르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서고, 손돌이 손돌목(염하)을 건너는 길안내를 맡았다.

손돌목의 급한 물살로 뒤집힐 것만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세지는 물살 가운데로 배를 몰아간다.

불안한 임금은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손돌은 죽기 전에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를 따라가던 배는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임금이 강화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말하기를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내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용두돈대)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손돌의 무덤이 있는데, 평화누리길 김포1코스 대명항-문수산성입구까지 15.4km를 걷다보면 손돌의 무덤을 볼 수가 있다.





신미 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 순의총(辛未殉義塚)은 조선 고종8(1871, 신미양요) 광성보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쌍충비(雙忠碑)

쌍충비(雙忠碑)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외 59인의 순절비다.








광성보(廣城堡) 안해루(按海樓)

광성보(廣城堡)는 조선 효종9(1658)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로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廣城墩臺)는 광성보에 속한 3개 돈대중 하나로 숙종5(1679)에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











광성보삼거리









강화나들길2코스 초지대교-.강화대교-성동검문소까지 19.7km, 제2부 광성보삼거리-성동검문소까지 11.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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