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월 청령포(淸怜浦) 탐방기 2009-0215

산솔47 2011. 4. 6. 13:31

영월 청령포(淸怜浦)|산솔산방

 

 

청령포는 조선왕조의 임금인 단종이 세조2년(1456년)에 노산군(魯山君)으로 낮추어져 처음으로 유폐 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폐배지로 적합한 곳이다.

단종은 1457년 6월부터 두달 동안 이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관풍헌(觀風軒)은 영월 동현의 객사(客舍)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을 하다가 1457년(세조3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승하하셨다.


탐 방 지 : 영월 청령포(淸怜浦) 탐방
탐방일자 : 2009. 02/15(일)
탐방시간 : 7km/3시간30분
교 통 편 : 4050나인산악회(010-5234-8443) http://cafe.daum.net/runnin27
입 장 료 : 1,300원


 

  • 영월 청령포(淸怜浦)
    청령포는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의 한복판에 마치 섬처럼 동서 북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절벽과 산으로 막혀있어 귀양지로서는 이를데 없는 곳이다.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청령포 안내소 : 033) 370-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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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어가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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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지비각
    이비는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전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라 새기고
    후면에는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 石」(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각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금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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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표비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안에서 금표나 금송에 대한 채취 금지항목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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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향탑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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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음송
    청령포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 遺址碑閣(유지비각)서편에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으로 주변에는 우거진소나무의 숲이 있고, 관음송은 그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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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산대
    망향탑은 석공이 아닌 왕이 만들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아야겠지만 망향탑이 있는 노산대 절벽은 자연이 만든 걸작이었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고 하지만 뭐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보아서 그런지 아찔한 멋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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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령포탐방기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상왕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셨답니다.

    단종께서 2개월간 유배생활을 하셨던 곳.. 서강의 청령포..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 쌓여있고,
    육지와 연결된 한면은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출입이 불가능한,
    마치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지금도 청령포를 찾는 탐방객들이 많다는데, 우리 일행도 동강의 잣봉 등산을 마치고 서강으로 이동,
    청령포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청령포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합니다.

    입장료는 1,300원,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청령포에 도달합니다.

    '청령포'는
    수백년은 됨직한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서선 완전 휴양지 같습니다.

    섬을 연상케 하는 청령포 한가운데 단종이 기거했다는 기와집 단종어가가 있구요.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 군락의 한가운데 예사롭지 않은 두갈래로 갈라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관음송입니다.
    600년이나 되었다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는 망향탑이라는 돌탑이 서 있는데,
    이 돌탑은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랍니다.

    노산대 절벽은 자연이 만든 걸작으로,
    강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현지증마져 느낄 정도로 앗-찔한데, 지금은 위험하다 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노산대에서 망향탑이 있는 '육육봉'을 바라보는 경치는 서강과 어우러져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숲 속에 세워져 있는 금표비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안에서 금표나 금송에 대한 채취 금지항목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랍니다.

    어린 단종의 유배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소나무에 걸터 앉아 무었을 생각했을까요?

    돌탑을 쌓면서 부인 송씨를 얼마나 그리워 했을까요?
    노산대에서는 시름을 달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냈을까요?

    이러한 애환이 담겨있는 청령포를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나룻배를 타고 넘어옵니다.